목차
사람은 언행만 보고 판단하지만 본질은 중심에 있다



사람들은 누군가의 말이나 행동을 보고 판단합니다.
“저 사람은 거칠게 말하네.” “저 설교는 훌륭했어.” “저 상담가는 논리가 똑똑해 보여.”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 언행이 어디서부터 나왔느냐입니다.
어떤 생각의 구조에서 말이 나왔는가? 어떤 감정 상태에서 그런 행동이 나왔는가?
무엇보다, 그 중심은 사랑인가, 교만인가, 통제인가?
저는 모든 언행을 판단할 때 항상 그 뿌리와 중심이 어디에 있는가를 먼저 봅니다.
그렇기에 겉으로는 사랑을 말하는 설교자도 그 중심에 ‘두려움’이나 ‘통제욕’이 있다면,
그 말은 결국 사람을 짓누르거나 불안하게 만들게 됩니다.
반대로 겉으로는 조용한 말이라도 그 중심에 성령의 기쁨이 있고, 평안이 흐른다면
그 말 한마디가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설교는 질문만 던지고 해결책은 없다



많은 목사들은 설교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여러분은 하나님을 사랑하십니까?” “정말 용서하고 계십니까?” “이웃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하지만 대부분의 설교는 질문을 던진 후, 멈춥니다.
어떻게 해야 그게 가능한지, 어떤 태도와 감정 구조를 바꿔야 하는지, 구체적인 실천법을 제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사람들은 감동을 받지만, 삶의 현장으로 돌아가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습니다.
여전히 갈등하고, 상처받고, 분노하며 살아갑니다. 질문은 던졌지만 길은 제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제안하는 화법은 실제로 해결합니다.



저는 다르게 생각합니다.
문제 해결이 되지 않는 말은 아무리 좋아도 무력하다고 봅니다.
그래서 저는 귀빈접대술과 최상화답술이라는 두 가지 실천적 화법을 제안합니다.
귀빈접대술은 상대를 존귀한 존재로 대하는 말과 태도입니다.
사람을 평가하거나 지적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를 환대하는 방식입니다.
최상화답술은 어떤 질문이나 불만, 공격적인 말이라도 그것을 감탄과 평화로 바꾸는 응답 방식입니다.
말로 치유하고, 말로 분노를 무력화시키는 최상 반응술입니다.
이 두 가지 화법을 실제로 적용하면 대화 중 다툼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집니다.
왜냐하면 이 화법은 교정하거나 지적하려는 목적이 없고, 오직 상대의 심령을 살리는 목적만 있기 때문입니다.
다툼과 범죄는 언어이전의 감정과 태도에서 비롯된다



범죄나 폭력, 다툼은 단지 말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 더 앞에 있는, 사상과 감정의 구조에서 시작됩니다.
내가 옳다는 생각, 상대를 고쳐야 한다는 판단, 내가 손해 보지 않겠다는 감정
이런 중심 상태가 있는 한, 어떤 좋은 말도 결국 다툼으로 이어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제가 제안하는 화법은 애초에 중심을 바꾸는 방식입니다.
교정 대신 경청, 주장 대신 수용, 반응 대신 감내성 쾌감.
이 상태에서 나오는 말은 다툼이 아니라 기쁨, 평화, 감동을 낳습니다.
그래서 저는 확신합니다. “이 화법을 적용하면 범죄는 줄어들 수 있다.
대화 중 다툼은 원천적으로 불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중심이 바뀌면, 언행도 바뀌기 때문입니다.
맺음말
문제는 말이 아니라, 말이 나오기 전의 심령상태입니다.
실천 없는 설교는 질문만 던지고 멈추지만,
귀빈접대술과 최상화답술은 중심부터 바꿔 다툼을 막습니다.